'생각들'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12.07.07 아이폰으로도 되는군 1
  2. 2012.05.30 오랜만이다.
  3. 2008.07.23 풋볼 위클리, 잠시만 안녕.
  4. 2007.07.24 12nights 13days in L.A 2
  5. 2007.04.17 하나를 위하여, 우리학교... 3
posted by sinji9 2012. 7. 7. 02:38
근데 이거 뭐이리 싸이 다이어리 만큼의 서비스 질을 제공하는 느낌이다냐..아니 그건 최소한 스티커라도 주어지지...이건 뭐죠?
posted by sinji9 2012. 5. 30. 22:18

이곳에 오랜만에 왔구나.

오랜만에 왔지만, 축구는 꾸준히 보고 있었고, 내 팀은 많은 변화가 있었구만.

블로그 다시 시작해볼까...

이제는 선수와 움직임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공 움직이면 오오오오

골이 들어가면 우와와오아와와~~~~~~

골을 먹게되면 읻곻나;ㅇ로나;ㅇ로나;ㅇ롷ㅇㄹㅇㄹ허

 

요즘은 골을 먹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 맨날 경기장에서 욕질만..

 

그래도, 사랑한다. 내 팀 성남일화천마야.

 

posted by sinji9 2008. 7. 23. 12:15
03년이었나 02년이었나..키노라는 월간잡지가 망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모르시는 분들께 부연설명 하자면

나름 있어보이는 사람들-_-;;을 위한 잡지는 아니었고, 특정 영화의 철학적 사유에 대한 각 평론가들의 글,
새로운 유럽, 아시아 그리고 제3세계 영화들의 소개.
명감독 그리고 신진감독들과의 이런저런 작품의 장면에 대한 심도있는 인터뷰들과
개봉된 영화들에대한 짧지만은 않은 기사들이 그 주류였습니다.

그당시 많이있던 영화잡지와의 차별성은 역시 영화 그 자체에 촛점을 맞춘다라는 점이었다고 생각하는데요. 키노의 모토가 '한국의 카이르 뒤 시네마를 표방한다'였으니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신분이라면
어떤 류의 잡지였는지 보지않으셨던 분들이더라도 모두들 기억하시겠지요.

아, 카에르 뒤 시네마를 모르시는 분들에게 설명하자면,
영화평론이 주가 되는 잡지로, 여기서 정책적으로 작가(감독)를 밀어주고, 평론을 써주며
공론을 이루게 하면서 프랑스 영화 자체의 질적 저하를 막는 역할까지 하는 잡지이고,
지금 한국의 영화잡지랑은 그 주제의 무게감에서 부터 다르지요.

뭐.. 지금은 나름 무거운 내용이라고 젊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시네21같은 경우엔
초창기엔 나름 격주 키노스러웠었는데, 그 초창기의 시네21이 타깃을 잡았던게 키노같은 무거움보다는 조금 더 가볍고 트렌디한 내용이 목표였었다니, 지금의 그 중앙일보에서 자본가지고 있는 그런 잡지와는 내용과 평론의 클래스부터가 다르지요.(평론가 정성일의 평론에 대한 평가는 할 수 있지만, 그가 영화평론에 끼친 영향은 모두들 부정적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튼 상업적인 부분을 최대한 배제했었고, 영화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지침서역할도 하고있던
그런 잡지였는데, 망했습니다.

저기 프랑스에 프랑소와 트뤼포라는 누벨 바그를 이끌던 한 감독이 말했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최초의 단계는 영화를 보는 것이고 그 다음 단계는 영화 평론을 쓰는 것이고
마지막 단계는 직접 영화를 찍는 것이다."(실제로 이사람은 프랑스의 영화키드 출신이고, 카에르 뒤 시네마의 유명한 평론가였으며 영화역사에서의 위대한 감독입니다.)

그제였던가요? DC 국축겔에서 나온 주제(라고읽고 떡밥이라고 말한다)중

풋볼 위클리의 잠정적 휴간에 대하여 말이 나왔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 풋위가 축구잡지계의 카에르 뒤 시네마 같은 역할을 하기를 바랬었습니다.

처음 풋볼 위클리의 존재를 알고 잡지를 샀을때는 그 디자인의 조악함에 놀랐었고,내용의 부실함에
실망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잡지는 내가 좋아하는 K리그를 다루고 있었고, 나와 같은 취미를 공유한
사람들의 관심사를 잡아보고자 노력하는 잡지였습니다. 거기다가 두 명의 직원이 국축겔러였으니
나름 현재 리그를 보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잘 찝어낼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도 했구요(이 부분은 풋볼다이어리 이외에는 잘 표현되지 않았지만)

분명 계속 성장할 수 있었다면, 좋은 잡지가 될 수 있었다라는 되도않는 이야기는 버려두고,
이야기 한다면, K리그의 선수들의 이야기를, 코치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관중들의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언제 다시 나올지 기약이 없습니다.

다시말하면, 이 마이너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같이 이야기 하게 도와줄 수 있는 잡지가 사라졌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 점이 가장 슬프네요.


가끔씩 가판대의 영화잡지를 볼 때마다, 키노를 기억합니다. 이제는 포포투의 표지를 보며 풋위를 기억할 것 같기도 합니다.



이 글을 국축겔에 쓴 글을 다시 표현만 고쳐서 올린글입니다-_-;;
posted by sinji9 2007. 7. 24. 05:44

<가기전>

어찌저찌해서 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SMC라는 커뮤니티 컬리지(한국말로 하자면 전문대?)에 붙어버렸다. 위치는 해변가로 유명한 santa monica, 연고가 없는 나는 내가 집을 열심히 알아봐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과 처음가보는 Westside[각주:1]일찌감치 흥분해 있었다. 그리고 새벽4시;; 사랑스런 룸메를 깨워서 나를 공항까지 ride시켰다 ㅋㅋㅋ

<관광>
엘에이의 날씨는 우리나라로 따지면....9월즈음??? 하늘은 높고, 바람은 시원하고 햇볕은 따갑다. 가끔 점심때의 뙤악볕까지 우리나라의 날씨좋은 그 느낌 그대로를 가지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한명[각주:2]과 한인타운의 찜질방에 방을 잡고, SMC를 한번 둘러보았다. 전문대느낌? 도서관은 쾌적했다. 그리고 영어와 섞여서 들리는 한국어;;;;

그리고 인디폴에서 2차인원합류(아는 형2명) 본격적인 관광의 시작. 첫날은 그냥 가볍게 산타모니카 해변과 엘에이 도심에 있는 천문대를 다녀왔다. 엘에이의 야경은 매우 '거대한 도시'의 느낌 그것이었다. 하지만 서울과 달라보였던 이유는 서울과 같은 거대한 빌딩의 정글이 아닌 중세시대의 성(빌딩들이 모여있는 다운타운)을 중심으로한 마을의 느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날은 뭐했더라....아, 아웃렛을 가서 쇼핑[각주:3]을 하고....도박과 환락의 도시라는
'라스 베이거스'로 차를 타고갔다. 물론 운전은 내가 했다. 가는길에 초큼 밀리기는 했지만...앞에서 지도를 그려주는 운전 고수덕분에 재밌게 서울-부산 정도를 3시간 반에 끊어버렸다. 80~100마일로 달리니 그렇게 되더만요-_-;; 저녁 11시반에 도착...늦어서 재밌는건 하나도 못보고 그냥 돈만 한 10만원 잃고왔다-_-; 그래도 거리는 이쁘더라 ㅋㅋ

또 쇼핑을 하고 돌아오니 11시 반..자고 그 다음날은.....redondo beach라는 곳을 다녀왔다. 추천에 의해서 간 곳이다. 그 근방에 유니끄한 옷가게랑 헤어샵이 많아서 배우지망생들을 볼 수 있다는 추천을 받아서 갔는데 일요일이라 그런지 순 멕시칸밖에 못봤다-_- [각주:4]

그리고 월요일....헤어짐의 시간....형들을 공항에 내려주고 그 사람을 내려주고 난 숙소로 향했다....라고 말하면 얼마나 좋겠는가.....차사고냈다-_-;;; 형들은 늦어서 비행기를 놓치고 근처에서 인터넷으로 티켓을 알아보는 동안 난 차를 끌고 그 사람을 데려다주러 갔는데 그 와중에 교통정체 + 1000마일은 족히 운전한 피로의 가중 + 그 사람의 수면으로 인한 정신혼미등으로 살짝 상대범퍼를 받았는데...[각주:5] 내 미국생활중 최고의 위기. 그 놈은 열받아서 내려주고 놓쳤다는데 안가버렸다...그렇게 인연의 끝

형들도 결국 다 잘 보내긴 했다.


<집을 구하는 여정>

지난주 수요일부터 오늘 월요일까지 차없이 다녔다. 이런저런 이유로 낭비가 심해져서 버스를 타고 다니며 걸어다니면서 집을 알아봤다. craigslist.org라는 미국인이 가장많이 사용한다는 사이트에서 이메일을 150통넘게 보낸거 같은데 답전화 3번정도 받아본거갔다. 나머지는 다 전화번호가 쓰여있는 곳에서 알아보고 다녔는데, 하루에 적게는 10km 많이는 15km를 걸었다. 어떻게 아냐고요? 제 mp3은 몇km걸었는지 나옵니다-_-v

여튼 이런저런 고생끝에 이탈리아노 부부(비센차 출신이라던데)가 세놓은 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수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배낭은 11kg,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7kg.....군대행군 다시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하루에 숙소인 찜질방비 $20 + 아침 +2.5 + 음료수값 3 + 저녁값 8 = 35불정도로 4.5일을 살았다..
찜질방이 좋은 시설이라 정말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제 돌아간다.

물론 가자마자 다음날 계약금의 나머지를 다 내야하고, 은행계좌도 끊어야하고, 공기압축팩도 사야하고 이런저런 일이 많지만....그래도 집이 좋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수원 삼성이 하는 축구는 커녕 아시안컵도 못봤지만...........뭐 그것보다 중요한 영어연습을 많이 했다는 것에 만족해야겠다-_-;;;

아, 다음달이면 인디애나 통신이 아닌 l.a통신이 되겠구나 ㅋㅋㅋ

  1. 스티브 유가 외치던 그 웻싸~ [본문으로]
  2. 해병대까지 다녀왔다는 사람이 저렇게 감이없을수 있구나...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솔직히 바보스러웠다)..미국에서 만난 인연중 가히 최악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3. 쇼핑 또 한번하면 손을 짤라야겠다-_-;; [본문으로]
  4. 제기랄 사람도 때를 잘 맞춰야된다-_-;; [본문으로]
  5. 그당시 렌트카에 내 이름은 올라가있지 않았었다. 그리고 주인의 폰은 꺼져있고.. 여기서 내 면허증을 내밀면 보험혜택도 못받고 나는 본국소환 ㄱㄱ-_-...주인의 면허번호를 못찾다가 서류에서 겨우 찾았다....시바....결국 보험혜택받고 없던 일로 되었다. [본문으로]
posted by sinji9 2007. 4. 17. 10:11
 

사용자 삽입 이미지오사카에서 진행한 추모영화제 팜플릿


2003년 어느 겨울이었다.[각주:1]
시네21을 다 보고 맨 뒷장의 구인란을 보던 도중 눈에 띄는 자원봉사자 모집란이 있었다.

"고 조은령감독 추모영화제"

그녀에 대해서는 스케이트[각주:2]라는 영화의 젊은 여성감독으로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죽은 이유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자원봉사를 하기 위하여 연락을 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보고, 열심히 먹었다.

그리고 하나를 위하여를 보았고, 그 영화에 나오셨던 오사카의 김지석 선생님, 영란이 누나, 그리고 리혜랑 선생님을 만났었다.[각주:3]그리고 거짓말같은 이야기를 하시며 떠나셨다.김지석 선생님이었던걸로 기억한다.

"내년 3월에 오사카에서 추모영화제를 할 예정입니다. 꼭 와주세요"

가고 싶었지만, 갈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돈도 없었고, 그곳에서 잘 곳도 없었으니까. 거기다가 3월은 개강의 달.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2004년 3월 2째주 목요일이었던걸로 기억한다. 나는 친한 형과 영화제에서 만난 현정이누나, 소정이 누나, 고영재형님[각주:4] 오류미씨, 그리고 성함을 묻지못했던 영진위 독립영화분과위원분과 오사카로 향했다.

기찬이 형님[각주:5]과 형수님이 자신이 살고 있던 공간을 조금 우리에게 내주게 된 것이었다.

그곳에서 실제 아이들의 순수함을 보고, 실제로 학교간판이 뜯겨진 모습을 보고, 여러 재일한국인들의 모습을 겉으로나마 보았다. 오사카중학교 아이들의 졸업식을 본것은 나에겐 행운이었고, 잊지못할 경험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6개월후 군대를 갔다.

그때 연락하던 많은 분들과 연락이 거의 다 연락이 끊겼고, 그냥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 어느 게시판에서 '우리학교'를 보셨다는 분의 글을 보았다.
그분은 '하나를 위하여'가 아닌 '우리학교'를 보셨지만, 영화를 본 후 느꼈던 감정은 나와 똑같았다.
그리고 난 부랴부랴 우리영화에 대하여 찾아보게 되었고,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반가운 노래를 만나게 되었다.
오사카에서 cd로 받은 음반인데...항상 이 노래만 들으면 가슴이 찡해지고 많은 추억이 기억이 난다.

이 노래는 나와 하나를 위하여,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많은 분들을 연결해주는 노래이다.

제목은 하나 아리랑으로 알고 있었는데,아리랑 연가라고 합니다.



이 노래를 들어보시고, 와닿으시는게 있으시다면, 우리학교 꼭 한번 보세요.
금액중 1000원은 조선학교의 기부금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것이 포스터!!




  1. 11월말 혹은 12월초일 것이다 [본문으로]
  2. 칸 영화제 단편부분 본선에 진출하여 당시 화제를 일으켰었다..그당시 최우수상도 다른 한국인감독의 영화가 탔었다..영화는 단순하다 10여분동안 진행되는데, 한 시골 여자꼬마아이가 스케이트 타는곳에서 본 서울에서 온 남자아이에게 호감을 갖고 몇일에 걸쳐 고민하지만 말을 걸지 못한다. 그러던중 그아이의 스케이트가 굴러떨어진 것을 그 남자아이가 줏어주고 말을 해보지만, 그 남자아이는 벙어리. 무서워서 스케이트도 줍지 못하고 밖에도 못나가던 아이, 결국 몇일후 나가보지만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스케이트였다. [본문으로]
  3. 그당시 북한의 일본인 납치 인정으로 총련측에 쓰레기들이 몹쓸짓을 많이 하였고, 일본국민, 매스컴의 인식또한 굉장히 좋지 않았을 때이다. 백분토론에도 나오셨던 기억이 난다. 그분들은 합쳐지고 있는 총련과 민단사이를 분열된 대상으로 보이려 애썼던 손석희와 제작진에대해 실망하시는걸 아직도 기억한다. [본문으로]
  4. 우리학교의 제작자 [본문으로]
  5. 하나를 위하여에서 교토대유학생으로 출현하셨다..지금은 아마 한양대 문화인류학과에서 후배들을 상대로 강의하실텐데..못뵙고 나온거 참 후회된다 [본문으로]